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라비트 왕조 (문단 편집) ==== 압둘라 & 야흐야 빈 이샤크 ==== 야흐야가 떠난 이후 마요르카의 압둘라는 이비자와 메노르카를 장악한 무와히드 왕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2세 및 제노바 공화국과의 친교를 유지하였다. 특히 후자의 해군력을 이용하기 위해 1188년 체결된 제노바와의 통상 조약에서 압둘라는 마요르카의 외국 상인들을 위한 교회와 상관 건립을 허가하였다. 이후 (아라곤과 경쟁하는) 프로방스 및 무와히드령 알 안달루스 해안을 습격하였다. 한편 콩스탕틴에 위치한 무와히드 군사령부는 알리의 죽음 직후 두 차례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이에 야흐야는 내륙으로 철수, 그곳에서 카라쿠쉬와 함께 이프리키야의 무와히드 거점들을 공격하였다. 카라쿠쉬가 함께 정복한 트리폴리 및 가베스를 내놓지 않으려 하자 1195년 야흐야는 베두인 계열의 바누 술라임[* 파티마 조가 지리 왕조를 응징하기 위해 보냈던 부족 중 하나. 이후 이프리키야 정착]과 연합하여 그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본국의 압둘라로부터 2척의 함대를 지원받은 야흐야는 트리폴리를 점령하였다. 이후 가베스를 취한 야흐야는 북쪽으로 진격하며 마사킨, [[카이로완]]을 점령하였고 북쪽 해안으로 이동하여 [[베자]]와 [[안나바]]까지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195년의 [[알라르코스 전투]] 이후 레콘키스타를 좌절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았던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무라비트 측에 대처하기 위해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못하고 1197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평화 조약을 맺을 정도였다. 한편 야흐야가 엄청난 성과를 거두는 동안 마요르카의 압둘라는 1200년 겨울 무와히드군으로부터 이비자 섬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그는 메노르카를 포위, 몇달간의 봉쇄로 주민들이 식인을 하기까지에 이른 후에야 섬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1203년, 1만 5천의 보병과 1천 2백의 기병, 7백의 궁병을 실은 무와히드 함대가 아부 알 울라와 아부 사이드 우스만 이븐 아비 하프스의 지휘 하에 발레아레스 제도에 진입였다. 압둘라의 함대는 격파되었고 무와히드 군대는 손쉽게 메노르카를 점령하였다. 이후 그들은 마요르카를 포위하였고 두 달간의 공성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1203년 9월) 압둘라는 마요르카가 함락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발레아레스 제도는 무와히드 왕조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그 지배는 길지 않았다. 1208년 마요르카 총독으로 봉해진 아부 야흐야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아비 이므란은 이후 사실상 독립 군주가 되었고 1229년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가 마요르카를 정복하였다.[* 4달간의 포위 끝에 아부 야흐야는 하이메와 협상하여 도시의 온전한 항복과 무슬림 지도자들의 북아프리카 송환을 대가로 1인당 닭4마리 값을 지불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약탈을 원했던 아라곤 병사들이 이를 거부함. 이에 아부 야흐야는 남은 함대로 최후의 공격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중상을 입음. (12월 31일) 이듬해인 1230년 2월 상처가 도져 사망. 남은 10대 아들은 1234년 세례를 받고 귀족 작위를 받아 고토르 가문의 시조가 됨] 한편 본국이라 할 수 있던 마요르카가 함락되었음에도 1203년 12월 14일, 야흐야는 튀니스를 점령하며 알제리 동부에서 리비아 서부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 이 영토에는 알제리의 무와히드 총독부인 콩스탕틴보다 남쪽에 위치한 [[비스크라]]와 [[테베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무와히드 왕조의 행정력은 콩스탕틴 바깥으로 미치지 못하였다. 1204년 내륙의 [[카와리지파]] 베르베르 인들이 봉기하였는데 야흐야는 그들을 나푸사 산에서 패배시켰고 배상금을 받아낸 후 튀니스로 개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